재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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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님, 경복궁 뜰에서 눈물로 당신을 보내드린 지 벌써 17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쏜 살 같습니다. 저는 그때 장례위원장이었고 비통한 심정으로 추도사를 올렸습니다.
그 당시 당신을 배웅하던 청년들은 지금 어른이 되었고 그때의 어른들은 지금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저 역시 여든 살을 넘긴 노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렇게 지나간 세월을 헤아려보니 비로소 당신의 부재를 실감합니다.
대통령님, 그곳에서 평안하십니까? 당신의 동반자였던 김대중 대통령님 그리고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이해찬 총리님과 해후하셨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대한민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애쓰고 계시리라 생각하며 그리움을 달래어 봅니다.
어김없이 다가오는 오월의 봄 날, 저는 언제나 봉하 마을로 달려오는 시민들의 발걸음과 만납니다. 떠나간 대통령님을 그리워하는 많은 시민들이 17년 동안 한결같이 마음을 모아 봉하마을을 찾는 이 풍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시민들 마음속에서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어깨동무 할 수 있는 낮은 사람으로 자리 잡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모인 시민들이 당신의 정신을 되새기며 한 뼘씩 성장하는 만큼 대한민국도 그만큼 단단하게 자랄 것입니다.
어느덧 12.3 계엄도 1심 판결이 끝나고 항소심 단계에 와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계엄이 선포 되던 때 우리는 당신이 그토록 부르짖고 갈망하셨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광장에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명히 살아 있는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로 달려가 겁도 없이 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에게 달려들며 저항한 시민들을 보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부당한 명령이 내려졌음을 깨닫고 그 임무를 소극적으로 수행한 군경도 보았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위해 국회로 달려갔으나 국회 정문이 군 병력과 경찰에 의해 폐쇄되어 들어가지 못하자 국회의원들이 담장을 넘는 해괴한 장면도 보았습니다.
국회의장이 담을 넘어 들어가는가 하면 야당대표도 담을 뛰어 넘었으며 시각장애인 여성국회의원도 담장을 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당시 항간에는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려면 담장을 넘을 수 있어야 당선되겠다는 웃지못할 농담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여성들이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밤 길바닥에서 은박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쓰고 영하의 밤을 견뎌내며 내란의 암흑을 응원봉의 빛으로 몰아내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당신이 갈망했던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의 작동이었습니다. 결국 당신이 씨앗을 뿌린 민주주의의 싹이 자라 풍성한 숲을 이루어 우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한창입니다. 당신은 '평화가 곧 번영의 근간' 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총성이 멎은 상태를 넘어 우리 아이들이 마음 놓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이 바로 평화임을, 당신은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셨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 평화를 지키는 것이 곧 민생을 지키는 길이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흔들림 없이 평화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란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것이 뻔하고, 외롭고 어려운 처지가 될 줄 알면서도 오로지 국민과 국익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서민들과 막걸리 한 잔 기울이던 당신, 이 땅의 민중들이 손 내밀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언제나 있었던 당신과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함께 일할 수 있었기에 저희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우리나라는 제가 젊었을 시절만 해도 타국의 원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은 경제부문 세계 10위권이 되었고, 국방력은 세계 5위의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문화예술 부문 역시 국가경쟁력 세계 7위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 항상 원하셨듯이 이제 우리나라는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의존적 외교가 아닌 당당하고 줏대 있는 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위상은 어느 한 훌륭한 지도자가 이룬 것이 아니라 대한국민 모두가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전 세계적 아픔과 결핍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또다시 겪어야 하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우리 국민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더 크게 더 강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항상 살아계시는 노무현 대통령님,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당신이 못다 이룬 사람사는 세상의 꿈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고 항상 힘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제가 노무현대통령 만큼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분이 계십니다. 그동안 그 깊은 슬픔과 아픔을 홀로 이겨 내시면서
오늘의 봉하마을을 만드신 주인이십니다.
언제나 말없이 소리 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분, 17주기가 되기까지 한 번도 이 자리에서 그분의 아픔과 함께 하지 못하여 제가 오늘 단상에 올라온 이 기회를 빌어서 그동안 겪으신 권양숙 여사님의 아픔과 외로움에 우리 모두가 함께 동참하고자 합니다.
이 고귀한 큰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계신 권양숙 여사님께 오늘 서울에서 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온 봄의 향기가 가득한 꽃다발을 올리겠습니다. 권 여사님께 마음을 다해 큰 박수로 응원 부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권양숙 여사님 사랑합니다.
내년 5월, 새봄이 오면 이 자리에서 또다시 반갑게 만나 뵙겠습니다.